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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37) 안산 백련산 ③] 아베는 아나, 현저동 101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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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4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19.08.12 09:35:54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다시 독립문 앞에 선다. 이 일대는 독립공원이다.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운 이래 이 지역은 독립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서재필 선생의 동상도 여기에 있다. 무악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모화관을 본떠 지은 독립관이 서 있다. 아니 무엇 때문에 모화관을 본떠 다시 짓는단 말인가. 그 이유는 독립협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모화관을 폐쇄하고 그 건물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독립관(구 모화관 건물)도 파괴되었는데 1995년 말부터 1년에 거쳐 본래 독립관 자리에서 350m 쯤 북쪽으로 이동한 독립공원 내에 신축건물을 세워 독립관이라 하였다. 용도는 순국선열 현충원이다.

오늘 갈 길은 겸재의 그림 안현석봉(鞍峴夕峯)을 따라 걷는 길이다. 겸재의 양천현령 시절 한강 너머로 바라보이는 안산(鞍山, 무악산毋岳山, 안현鞍峴)의 저녁 무렵 모습을 유려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주 산줄기로는 안산과 백련산이 잘 그려져 있다. 우리도 이 두 산을 이어 걷게 될 것이다.

 

이름은 독립관이지만 형태는 중국을 사모하는 ‘모화관’의 모양을 본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우선 옛 지도를 다시 펼쳐 본다. 사진 2는 도성도인데 지도 속 숫자는, 1이 현재 독립공원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자리 잡은 현저동 101번지 지역이다. 2는 안현(鞍峴), 3은 봉원천의 상류인데 봉원사(奉元寺)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개울 좌우로 산기슭에 기대어 연대(延大)와 이대(梨大)가 터를 잡았다. 4는 아현천(阿峴川)이다. 이 개울에 걸려 있던 다리가 굴래방다리였다. 4라고 쓴 숫자 옆 산줄기에 점(点)을 하나 찍어 놓았는데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소가 있던 중앙여고 뒷산을 표시해 보았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손자, 즉 사도세자의 장자(長子)인데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세손(世孫)으로 책봉된 후 3살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세손의 무덤이다 보니 상당히 무덤이 컸으므로 뜻 모르는 이 지역 민초들은 애기릉이라고 불렀고 이 애기릉 안쪽 마을을 능안(陵안)이라 불렀다. 요즈음 안산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능선, 안산자락길에는 능안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놓았는데 그 유래를 적은 글에는 ‘陵安亭(능안정)의 由來(유래)’라 적어 놓았으니 안(內) 쪽 마을을 편안한(安) 마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진 2. 서울 옛 지도. 

이 능안마을 끝 안산 자락에는 예부터 복주물(福注물?, 안내판에는 福主우물이라 써 있음)이라는 훌륭한 약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복지물’이라 불렀고 뒷산 안산도 동봉과 서봉 사이가 말의 안장 같이 생겼기에 ‘말락바위’라 불렀다.

끝으로 5는 모래내이다. 사천(沙川), 홍제천(弘濟川)이라고도 한다. 좌우로 그린 화살표는 우측은 사직터널, 좌측은 금화터널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읽어보는
한용운의 옥중시 “눈 오는 밤”


독립관에서 무악재 방향으로 잠시 이동하면 붉은 벽돌 건물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군은 경성감옥으로 시작하여 서대문감옥, 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이제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되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많은 곳이다. 필자 젊었을 때는 남녀 젊은이들이 사귀는 방법으로 단체 미팅이라는 것을 많이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남자 측에서 자꾸 연락처를 알려 달라 하면 현저동 101번지라고 대답하라는 농담이 유행했었다. 서대문 형무소 주소가 현저동 101번지이니, 요새말로 하면 맘에 들지 않는 파트너가 전화번호를 따려고 귀찮게 굴 때 형무소 전화번호를 알려 주라는 농조(弄調)의 처방인 셈이다.

 

정치범에 배정됐던 서대문형무소 9옥사. 사진 = 이한성 교수 

오랜만에 역사관으로 들어가 본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수난에서부터 군사정권 시절 고초를 겪은 이들의 상황을 전시해 놓았다. 여기에서 고초를 겪은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유관순 누나도 이곳에서 고초를 겪고 영영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은 3.1 운동 후 이곳에서 2년여 고초를 겪었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선생의 옥 중 시(詩) 한 꼭지씩 읽고 간다.
설야(雪夜)란 제목의 한시 한 편 읽는다. 김광균의 설야와는 달리 우울하다.

四山圍獄雪如海 산이 에워싼 듯 감옥에 해일처럼 눈은 쏟아지고
衾寒如鐵夢如灰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꿈은 한낱 재와 같네
鐵窓猶有鎖不得 철창은 여전히 어찌할 바 없는 사슬인데
夜聞鐵聲何處來 한 밤 철커덕 쇠소리 어디에서 오는 건지


옥중에서도 애국하는 시조도 전해진다.

무궁화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옛 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 무궁화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에 / 사랑으로 도우고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가이 없이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를 넘어 가서 / 너의 빛을 따르고자.
(개벽 1922년 9월호)


만해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면서 3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변호사를 내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그러나 아쉽게도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이들이 있다. 요즈음 일본과 첨예하게 날을 세우면서 문득 만해 선생이 그리워진다.
 

아직 남아 있는 옥바라지 옆 골목의 옛 흔적. 사진 = 이한성 교수

옥바라지 한 품은 골목길,
이제 ‘OO캐슬’이 뒤덮어


한편, 가족 중 누군가 감옥에 갇히면 나머지 가족이 죽을 맛이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병마의 괴롭힘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뒷바라지는 모두 가족 몫이다. 자연히 감옥소 가까운 곳에 올라와 거처를 정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곳이 옥바라지 골목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건너 인왕산 쪽 골목길에는 다닥다닥 여인숙, 여관이 자리 잡았고 옥바라지하는 이들이 상경하여 몸을 기탁하는 곳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그대로 남아 있던 옥바라지골목은 이제는 OO캐슬이 되어 그 애환은 땅에 묻혔다.

 

이곳이 무악재임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잠시 무악재 고개로 다가가 본다. 이제는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무악재 고갯마루에는 무악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위 하늘에는 안산과 인왕산을 잇는 하늘다리가 가설되었다. 이어 종주산행 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일찍이 인왕산 ~ 안산 ~ 백련사 ~ 북한산(탕춘대 능선)을 잇는 4각형 종주 산행을 해 왔는데 이곳 무악재와 녹번현에 생태다리 두 개가 건설되어 행복해 하고 있다. 지자체들의 서비스 덕분이다.

무악재를 되돌아 내려와 안산 방향 자락 길을 오른다. 처음 찾아갈 곳은 안산 남쪽 기슭 봉원천 상류에 자리 잡은 봉원사(奉元寺)이다. 봉원사에 대한 내력은 졸고 ‘옛절터 가는 길 11’(인터넷 검색 가능)에 이미 소개했으므로 긴 설명은 줄이려 한다. 바람 쏘이는 수준에서 관심사만 살펴보련다. 조선의 독서광 청장관 이덕무(李德懋)도 안산 주변에 바람 쏘이러 왔던 그 날을 일기로 남겼다. 1746년(영조 40년) 9월 18일의 일이다.

 

봉원사의 대방(大房). 공덕리에 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 건물을 옮겨 세운 건물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편지로 중오(仲五 이시복李時福)를 초청하여 서편 성문(城門)으로 나갔다. 의소묘(懿昭墓) 숲속을 거닐면서 석물들을 바라보고 다시 연희궁(延禧宮: 연세대 구내에 있던 이궁離宮) 옛터로 발길을 돌려 한참동안 둘러보다가 봉원사(奉元寺)에 들러 잠시 쉬면서 불서(佛書)를 읽었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모화관(慕華館) 뒷산 기슭에 장 원수(張元帥: 장만張晩을 이른다)의 안현(鞍峴)에 결진(結陣)하고 역적 이괄(李适)을 격파하던 일을 회상하니, 당시의 싸우던 모습이 눈앞에 역력히 보이는 듯하였다.

이어, 반송지(盤松池) 북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초가가 쓸쓸한데 동산의 단풍나무와 뜰 앞의 국화는 무르익고 아담한 그 경색(景色)이 마치 발라놓은[抹] 듯하고, 깁[絹]에 방금 네 폭의 그림을 마쳤는데 도사(道士)가 하늘로 오르는 용(龍)을 구경하고 있는 것과, 두 손님이 짙푸른 나무 그늘과 하얀 폭포 사이에 마주앉아 있는 것과, 약을 캐느라고 광주리와 도끼를 땅 위에 내려놓은 것과, 야윈 노새를 탄 사람 뒤에는 초라한 시동(侍童)이 책을 메고 따르는 것인데, 모두 고상하여 속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의 자는 이숙(頤叔)으로 그림에 특성을 가졌으니, 당대의 철장(哲匠)이다. 조관아재(趙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의 호)ㆍ정겸재(鄭謙齋: 정선鄭敾의 호)와 더불어 그 명성이 같았는데, 혹자는 그의 초충(草蟲)과 묵룡(墨龍)의 그림 솜씨는 아무도 견줄 수 없다고 한다. 조ㆍ정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의 대가(大家)를 논하면 이 한 사람뿐이다.

(書招仲五. 西出郭門. 逍遙於懿昭墓林樹中. 瞻望象設. 轉往延禧宮舊墓. 登眺移晷. 仍入奉元寺. 暫休觀佛書. 歸路. 登慕華館後麓. 憶張元師結陳鞍峴. 破逆适事. 其戰狀歷歷如可覿矣. 遵盤松池北谷. 訪沈玄齋師貞所居. 茅屋蕭然. 園楓庭菊. 濃澹如抹. 方畢畵四絹. 道士之觀昇龍者. 二客對坐於蒼樾素瀑之間者. 採藥而置筐及斧於地者. 跨瘦騾從以短僕擔書者. 俱瀟灑非塵矣. 字頤叔. 性於畵. 是一世之哲匠也. 與趙觀我齋鄭謙齋. 齊其名. 而或曰. 其草蟲墨龍. 無比云. 趙鄭皆老沒矣. 論大家藪. 惟一人)”

이덕무가 비난한 봉원사 승려 왜?

청장관 이덕무는 친우 이시복과 함께 의소세손 묘를 방문하고 이어서 연세대 구내에 해당하는 연희궁 옛터를 본 후 봉원사에 와서 잠시 불서(佛書)도 읽었다. 이어서 반송지 북쪽에 있는 현재(玄齋) 심사정을 방문했다. 앞서 소개한 지도 도성도(사진 2)의 지역을 다닌 것이다, 그러면서 관아재와 겸재가 없는 세상에서는 현재 심사정이 최고라 한다. 한편 청장관은 봉원사 승려에게 무시당한 일이 있었는지 ‘봉원사(奉元寺)’라는 자못 비판적인 시도 남겼다.

성 서쪽 5리도 못 되는 곳 城西不一堡
새로 지은 절 이름 봉원이라네 新寺曰奉元
금벽 단청(金碧丹靑) 귀신 같은 솜씨에 金碧類鬼神
지붕 모서리 날아갈 듯하구나 觚稜勢飛翻
동안(童顔)의 한 부처를 有佛顔如童
이곳에 모셔 받드는데 宅玆以爲尊
묻노니 무슨 공덕 있어 借問何功德
중생이 이리도 분망히 따르는고 衆生劇趨奔
완고한 승은 범보다 세서 頑僧健於虎
손이 이르러도 맞을 줄 모르네 客到不迎門
대낮에 방석에서 구벅구벅 졸지를 않나 白日蒲團睡
흉년에도 쌀밥을 지어 먹지 않나 荒年稻飯飡


이 시를 보면 절을 새로 짓고 봉원사라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어려서는 봉원사라는 이름은 모르고 새절이라고만 했다. 이 지역 어른들도 모두 새절이라 불렀다. 본래 이 절은 연세대 구내 어딘가에 있었는데 반야사(般若寺)라 했다 한다. 의소세손이 이쪽에 묻히자 영조는 반야사에 지금 봉원사 자리 땅을 내주어 절을 짓게 하고 현판도 써 내렸다 한다. 그리고는 이 절을 의소세손의 원찰로 삼았다.

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

봉원사는 태고종 본산인데 불화와 단청의 최고 기능을 보유하고 있고, 불교음악 범패(梵唄)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영산재(靈山齋)가 열린다.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다.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가곡780) 제50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괘불을 걸어놓고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인데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큰 행사로 금년에도 6월 6일에 열렸다.

대웅전 아랫마당에는 대방(大房)이 있는데 공덕리에 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 건물을 옮겨 세운 건물이다. 추사와 옹방강의 글씨가 돋보인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극락전 유리문 안에 장식된 목각(木刻)이 마음에 든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마음이 따듯해지는 조형물이다.

 

재현해 놓은 무악의 봉수.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안산으로 오른다. 정상 동쪽은 무악(毋岳)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법 우람한 바위산이다. 그밖에 서남북은 흙길이어서 안산자락길로 불리는 산책길들을 잘 만들어 놓았다. 언제나 여고 동창들과 은퇴한 시니어들이 북적이는 산책길이다. 정상은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가 있는데 서봉은 국가 시설물이 있어 개방되어 있지 않다. 동봉 위에는 봉수대를 재현해 놓았다. 본래 5개의 연조(煙竈: 아궁이)를 쌓아야 하지만 모형으로 1개만 만들어 놓았다. 접근이 안 되는 서봉(西峰)에도 봉수대가 있었다. 겸재의 그림 안현석봉(鞍峴夕峯)에는 이곳 무악에서 피운 봉화 불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그려져 있다.

목멱산을 설명할 때 이미 봉수(烽燧)에 대해 설명한 일이 있는데 오늘은 조선의 봉수 라인 체계를 살펴보려 한다. 조선은 5개의 봉수 라인을 갖추고 있었다.
 

남부 한반도의 봉수 연결도. 자료 사진

5개 라인 갖췄던 조선의 봉수 라인

1라인은 함경도 경흥 서수라에서 출발하여 아차산 거쳐 남산에 이르고,

2라인은 동래 다대포에서 출발하여 청계산 옆 천림산 거쳐 남산에 도착,

3라인은 평안도 강계에서 출발하여 무악 동봉을 거쳐 남산 도착,

4라인은 의주를 출발하여 무악 서봉을 거쳐 남산 도착,

5라인은 순천 돌산도를 출발하여 개화산 거쳐 남산에 도착하는 봉수 라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무악 동봉에 재현해 놓은 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출발한 봉화 불을 받아 남산 경봉수(京烽燧)로 릴레이하는 봉수대이다.

서봉은 봉수대를 재현해 놓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 의주에서 출발하여 무악 서봉을 거쳐 가는 라인이다.

그러면 신호체계는 어떻게 했을까?

평시에는 한 거(炬)요, 적이 보이면 두 거, 지경에 가까이 오면 세 거, 지경을 침범하면 네 거, 접전하면 다섯 거로 정하였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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