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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니콜라스 슬로보 "찢고 다시 꿰맨 캔버스가 바로 나"

리만머핀 서울 개인전서 정체성 반영한 신작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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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34호 김금영⁄ 2019.04.03 17:11:48

니콜라스 슬로보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엄청 꼬이고 꼬인 곡선 한 가운데 이 곡선을 내뿜어내는 근원지인 큰 덩어리. 마치 쿵쿵 뛰는 심장이 캔버스 화면을 뚫고 나와 몸부림치는 것 같은, 강한 생명력이 꿈틀대는 그 모습에 눈길이 간다.

리만머핀 서울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니콜라스 슬로보의 한국 첫 개인전을 5월 18일까지 연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정체성’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과정, 그리고 다른 사람이 바라본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니콜라스 슬로보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정체성을 작업에 녹여내려는 시도는 작품명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나라에 맞춰 번역된 작품명을 함께 발표하거나 영문을 함께 적어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작가는 이미지 캡션에 ‘Dyumpu(Slpash)’ ‘Ibuthathaka’ 등 생소한 언어를 적어 놓았다. 이 언어는 남아공 원주민 공동체 중 하나인 코사(Xhosa)족의 언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가 바로 코사족이라 짚었다.

그는 “나는 코사족의 후손이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모국어가 상실돼가는 현실 속 희미해지는 정체성을 느꼈다. 나 자신조차 무의식 중 코사어보다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품 제목 번역 요청도 항상 받아 왔지만 억지로라도 코사어를 사용하려 했다. 이것은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는 내 강한 신념”이라고 말했다.

 

니콜라스 슬로보 작가는 리본, 가죽, 나무, 고무 등 특징적인 재료들로 작업을 한다.(사진=김금영 기자)

또한 이는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작가는 “번역된 언어가 있으면 사람들은 작품보다 그 뜻에 먼저 집중하기 마련이다. 이때 작품 감상에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끼어들 수 있다. 백지 상태에서 오롯이 그 작품의 정체성을 마주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또 눈길을 끄는 건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들이다. 리본, 가죽, 나무, 고무 등 특징적인 재료들로 작업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에는 구리관을 새롭게 사용해보기도 했다. 여기엔 성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됐다.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재료를 접했는데 각 재료들이 쓰이는 방식, 그리고 여기에 무의식 중 개입돼 있는 선입견을 발견했다고 한다.

 

캔버스를 나이프로 찢은 뒤 꿰매는 방식으로 이뤄진 니콜라스 슬로보 작가의 작품.(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리본은 여성성, 그리고 가죽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재료로 많이 쓰이고 있었다. 특히 패션계에서는 리본이 남성 옷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며 “나는 이 상반되게 여겨지는 두 가지 재료를 따로 쓰지 않고 한 작품에서 뒤섞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브론즈, 구리 및 금관악기 등 강한 설질의 재료를 주조해 부드럽고 우아한 리본 스티치의 곡선을 표현하기도 했다. 작업을 설명하던 작가는 “나는 동성애자”라고 스스로 밝혔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성, 남성 이분법적 접근보다 포괄적이고 다각적으로 성 정체성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였다.

작가가 발견한 수많은 재료들이 한 화면에서 연결되는 방식은 바로 ‘꿰매기’이다. 나이프로 캔버스를 찢고 구멍을 내고, 여기에 여러 재료들을 꿰맨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을 꿰맨다기보다 ‘그림을 그린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내 작품은 장르적으로는 회화로 구분되지만 전통적 회화와는 굉장히 다르다”고 말했다.

 

작가가 찾은 스스로의 정체성 3가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코사족·동성애자

 

니콜라스 슬로보, ‘Ibuthathaka’. 캔버스에 가죽과 리본, 120 x 180cm.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애초에 작가 또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가 되려면 기존 미술계의 기득권을 좇지 말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미대 교수들의 조언에 다른 기법과 재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꿰맨 회화였다. 캔버스를 나이프로 찢는 것 자체가 작가에겐 바로 드로잉의 과정이다. 캔버스를 찢을 때 ‘이런 테마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단어를 적어 개요를 작성하고, 색감 등도 고른다.

붓을 사용하지 않은 그림에 ‘이것이 그림이냐?’는 질문도 들었을 법하다. 이에 오히려 작가는 “그림은 무엇일까?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라며 질문을 던진다. 그는 “꼭 연필과 물감을 사용한 게 그림의 진짜 정체성일까?”라며 “난 나이프를 사용하지만 내 작품 또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정해준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해가는 과정 자체가 모두 진정한 정체성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니콜라스 슬로보, ‘Ibele’. 캔버스에 가죽과 리본, 160 x 250cm. 2018.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그러면서도 “꿰매는 행위는 너무 힘들고 지루하고 하기 싫기도 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캔버스를 찢고 다시 꿰매가는 과정은 내게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작업”이라고도 강조했다. “꿰매는 행위엔 여러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나이프로 찢는 행위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걸 단순한 행위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계와도 연결시켰다. 그는 “나이프의 폭력적인 행위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약탈하고 지배하며 식민지화한 폭력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내 조국인 남아프리카 또한 식민지 역사를 지녔다”고 말했다.

찢긴 캔버스를 꿰맬 지라도 그 자국은 남는다. 그리고 그 자국까지도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침략을 한 자와 침략을 받은 자 사이의 아이러니한 공존과 평화가 이뤄지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그리고 이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라 개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며 “찢어졌다가 다시 꿰매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자신에 대해 수많은 재정의를 내리며, 자신을 형성해 간다. 그래서 꿰매는 건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위와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니콜라스 슬로보, ‘Dyumpu’. 구리, 180 x 115 x 150cm.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꼭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꿰매는 건 그 행위 자체로도 작가에게 힐링의 시간을 안겨주기도 한다고. 작가는 “꿰매는 건 단순해 보이지만 아무리 작은 부위를 바느질 하더라도 결코 아무 생각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다. 너무 힘을 줘도, 너무 느슨해도 안 된다”며 “손수 손을 비롯해 내 몸을 사용하기에 바느질을 할 때마다 손목, 목 근육까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단순히 일만 하면 이 몸의 반응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꿰매는 과정이 끝나면 성취감도 느껴진다. 과정은 지루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힐링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코사족’ ‘동성애자’ 등의 단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직 많이 남은 것 같다. 작품에서도 반듯하고 선명하게 쭉 그어진 직선이 아닌 여기저기 뒤엉킨 곡선들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작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에 작가는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100%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는 “나 또한 새로운 환경과 정보를 만날 때마다 계속 바뀌어간다. 인간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동적인 존재고,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정체성을 다 발견하고 안주한다면 얼마나 삶이 지겹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니콜라스 솔로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신작 및 근작 회화와 조각을 선보인다.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사진=OnArt Studio)

작가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어린 아이의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아이들이 아직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를 때 꼬불꼬불 선이 가득한 그림을 그린 뒤 ‘이건 엄마랑 아빠’라고 할 때가 있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그건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전형성을 탈피하고 느끼는 것 그대로 그린 스스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닌 직접 느끼는 것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보다 많은 것들을 느끼기 위해 혼자 사색의 시간도 많이 갖는다고 한다. 작가는 “나에 대한 자문으로 인해 작품에 정체성이 새롭게 덧입혀진다. 답이 내려진 명확한 그림보다 ‘이건 뭐지?’라며 궁금해 하고 각자의 의미를 찾아가볼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의 정체성 찾기 여정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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