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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23) 동소문~동대문 ④] 서울의 달동네 살려내니 이렇게 좋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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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20-621합본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12.31 09:21:21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타락산(낙산) 정상에서 성벽을 끼고 내려가면 동대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성벽 안팎으로 길이 정비되어 있는데 굳이 순성길에 나서지 않더라도 점심 식사 후 가볍게 다녀갈 수 있는 코스다. 성 안쪽 길은 이화동 언덕 마을로 서민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달동네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규모 있게 정비되고 특징을 살려 옛 마을이 살아났다. 내국인 관광객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니 통영의 동피랑, 군산의 해망동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는 마을도 살아난 것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낡고 복잡한 옛 지역은 무조건 부수고 새로 죽죽 뻗은 아파트촌을 만들던 우리가 방향을 이렇게도 틀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도 이곳에 갈 때면 으레 들려 커피 한 잔 마시는 집도 생겨났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오늘은 성벽길을 버리고 동쪽 산줄기를 타고 동망봉 방향으로 간다. 이제는 아파트촌이 되고 차가 다니는 도로가 된 이 산줄기는 타락산의 동쪽 능선으로 상산(商山)이라 했던 엄연한 산이었건만 이제 마을버스도 다니는 길이 되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살펴볼 만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비우당(庇雨堂), 동망봉(東望峯), 보문사(탑골승방), 청룡사(靑龍寺),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안양암(安養庵)이다. 2010년 CNB저널에 연재한 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 10, 11’에 내용이 설명되어 있으므로(인터넷에서 검색 가능) 이번 글에서는 상세한 내용은 줄이려 한다.

비 오는 날 재상이 우산으로 버틴 집 이야기

 

이제 이 동쪽 산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비우당 안내판이 보인다. 비스듬한 언덕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새로 복원하여 소박하게 지은 초가집을 만난다. 비우당(庇雨堂)이라 불리는 집이다. 안내판이 서 있으므로 그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옮겨 본다.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은 낙산 동쪽 상산(商山)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니라 문화 류씨 집안이던 류관(柳寬. 세종조 우의정,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지금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성, 황희 못지않은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이런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에서 ‘류 재상의 우산’이란 뜻의 류상수산(柳相手傘)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다.

그 후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난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집을 다시 짓고 류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저술했는데 ‘동원비우당기’에 이 집 비우당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또 이곳에서 만나는 8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읊었는데 이것이 비우당 팔경이다.

 

지봉 이수광의 5대조 외할아버지로서 세종대왕 때 우의정이었던 류관이 비가 새는 집안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재현된 초가집 ‘비우당’. 사진 = 이한성 교수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너무 사치”

그러면 지봉집(芝峯集)에 전해지는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지봉 이수광의 비해당 이야기를 직접 접해 보자.

나의 집은 동대문 밖 낙산 동편에 있다. 상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한 기슭이 남으로 뻗어 마치 읍하고 있는 형상이 지봉(芝峯)이다. 봉의 위에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은 앉을 수 있고, 또 큰 소나무 10여 그루가 마치 쓰러져 덮고 있는 모양이 서봉정(棲鳳亭)이다. 그 아래 땅은 평활하며 주위가 100무(畝)쯤 되는 구획의 동원(東園)이 펼쳐져 있다. 여기가 조용히 살기에 좋은 곳이다. 일찍이 하정 류(관) 정승이 청백리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초가 몇 채를 짓고 여기에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이 분이 나의 5대조 외할아버지다. 우리 아버지 대에 옛집이 작아 조금 넓혔다. 객이 집이 너무 소박하다 말하면 문득 답하기를, 우산에 비해서 역시나 사치스럽다 말해서, 듣는 이가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불초라서 선인들 업적을 능히 지켜내지 못하고 임진란을 겪으면서 남은 것이라고는 없게 된 옛터에 작은 집을 짓고 비우당(비를 가리는 집)이라 편액하였다. 대저 비라도 막겠다는 뜻이다. 또한 감히,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을 이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8 풍경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敝居在興仁門外直駱峯之東偏. 有山曰商山. 山之一麓邐迤而南。若拱揖之狀者曰芝峯. 峯之上有盤石. 可坐數十人. 又有大松十餘株如偃蓋形者曰棲鳳亭. 其下地更平衍. 周百許畝. 畫以爲園曰東園. 深邃夷曠. 有幽居之勝. 初. 夏亭柳政丞以淸白鳴世. 卜宅于玆. 爲草屋數棟. 雨則以傘承其漏. 至今人誦之. 卽余外五世祖也. 至余先考. 仍舊而小加拓焉. 客有言其朴素者. 輒曰. 比雨傘則亦已侈矣. 聞者無不悅服. 余以不肖. 不克保有先業. 自經壬辰兵燹. 短礎喬木. 無復餘者. 余爲是懼. 卽其故址. 構一小堂. 扁曰庇雨. 以爲偃息之所. 蓋取僅庇風雨之義. 而乃其所志則亦欲不忘嗣續. 以竊附於雨傘之遺風焉. 景有八. 記于左云.)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 이수광 선생은 당신이 사는 동원 윗산 줄기가 지봉(芝峯)이라서 그 이름을 빌려 스스로 호(號)를 지봉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의 호(號)는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일례로 율곡(栗谷) 선생은 밤나무골에 사셨기에 그 호가 율곡이며, 퇴계 선생이 사시던 곳의 개울이름이 퇴계(退溪)이니 당신의 호를 퇴계라 했고, 송강(松江) 또한 그러한 것을 보면 요즈음 우리가 붙이는 우리 세대의 호(號)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고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분들의 소박했던 ‘호’들

각설하고, 지봉은 이 비우당기 말미에 팔경이 있다 했다. 이른바 비우당팔경(庇雨堂八景)인데 오언절구(五言絶句) 시 8수(首)를 읊어 8개의 경치를 노래하였다. 이를 너무 세세히 기록할 수는 없으니 대강이라도 짚고 간다.

東池細柳 동쪽 연못의 가는 버들
北嶺疏松 북쪽 고개의 성긴 소나무
駝駱晴雲 낙산의 갠 구름
峨嵯暮雨 아차산의 저녁 비
前溪洗足 앞내에서 발 씻기
後圃採芝 뒷밭의 지초 캐기
巖洞尋花 암동의 꽃 찾기
山亭待月 산속 정자의 달마중

옛 사람의 자적(自適)하는 모습이 선하다. 너무 서운하니 게중 한 편이라도 읽고 가자. 오늘 주제와 연관된 타락청운(駝駱晴雲)을 읽고 가련다.

我愛山上雲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산 위 구름
朝朝相對臥 아침마다 누운 채로 마주 하네
我性懶於雲 내 천성 구름보다 더 게으르니
雲閑不如我 구름 한가해 봤자 나만은 못하리.

지봉 선생, 게으름 자랑에 푹 빠졌다. 그런데 이제 아파트촌이 촘촘히 자리잡은 상산 지봉을 보면 격세지감을 금할 수가 없다.

 

비우당 뒤편의 샘물 자지동천. 사진 = 이한성 교수

초가집 비우당 뒤편 바위벽 아래로는 아직도 자지동천(紫芝洞泉: 붉은 지초 골짜기의 샘물)이라는 샘이 고이는 우물이 있다.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 송씨가 사가로 쫓겨났을 때 이곳에서 당신을 보필하는 시녀들과 옷감에 물감을 들여 생계를 이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샘이다.

이제 비우당을 뒤로 하고 능선길을 따라 동쪽 끝에 있는 봉우리로 간다. 그곳이 동망봉(東望峯)이다. 정순왕후가 이곳에 올라 단종이 유배 간 동쪽 영월을 바라보아서 동망봉(東望峯: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영조가 친필로 내린 동망봉이란 글씨를 이 봉우리 바위에 새겼다는데 일제 때 채석장으로 개발되어 봉우리의 서남쪽 면이 잘려 나갔기에 영영 그 글씨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정순왕후의 눈물이 꽃 되어 내리는 우화루

이제 동망봉에서 다시 돌아내려 온다. 능선길 안부쯤 되는 곳으로 돌아오면 창신동에서 보문동으로 넘어가는 도로와 지봉능선이 교차하는 교차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남쪽 창신동 쪽으로 방향을 틀면 오른쪽에 청룡사가 있다. 정순왕후가 시녀들과 함께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절이다. 이곳에 궁궐 밖으로 이전해 나온 정업원(淨業院)이 있었기에 왕가의 한 많은 여인들이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머리를 깎고 허경(虛鏡)스님으로 일생을 살았다.

 

궁궐을 나온 왕가의 여인들이 살았다는 정업원(淨業院)의 옛터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정업원이 있었던 터임을 알리는 비각.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절에 오면 필자는 법당 앞 층계에 앉아 앞 건물 우화루(雨花樓)를 보기를 좋아한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할 때 꽃비가 내렸기에 절에는 우화루라는 전각이 많다. 이곳 우화루에 오면 내 마음은 정순왕후의 눈물이 꽃으로 떨어졌을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열다섯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궁에서 쫓겨나고 여든 둘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청룡사를 나서면 절 남쪽 벽과 맞닿은 곳에 작은 전각이 하나 있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터)를 알리는 비석을 보호하는 전각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영조는 재위 47년(1771년)에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고 친필로 글을 내렸다 한다.

 

청룡사의 우화루. 원래 ‘우화’(꽃비)는 부처님의 설법 때 내렸다고 하지만, 이곳 청룡사에는 정순왕후의 눈물도 서린 곳이라 내게는 ‘정순왕후의 꽃 같은 눈물’이 연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정업원구기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 정업원 옛터,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또 하나는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 앞 봉우리와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골목길과 100년 묵은 절집

이제 정업원구기 건너편 골목길을 통해 길을 내려온다. 이 골목길을 우산각골이라 부른다. 류관 선생이 사셨던 주위 땅이라서 그런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좁은 골목이 이제는 많이 정비되었으나 옛 동네 골목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길이다. 골목길을 나오면 지하철 6호선 창신역이 있다.

 

비 오는 날 집안에서 우산을 들었다는 재상 류관의 일화에서 이름을 딴 듯한 우산각골의 골목길. 사진 = 이한성 교수 

이제 창신초등학교 방향으로 내려온다. 1km 이상 걸어야 한다. 우측으로 창신초등학교를 만난다. 여기에서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와 보자. 이 지역이 옛 서울 골목길이라 미로 같은 길들이 이어져 있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돌아 옛 당고개를 넘으려는 바로 그곳에 안양암이 있다(창신초교로 들어가지 않고 두산아파트까지 내려와 들어와도 이 길을 만나다. 이때는 길 입구에 ‘불교박물관’이란 표지판이 있다.)

안양암(安養庵)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절이다. 오랜 역사적 자취는 없지만 이처럼 100여 년 전 작은 절집 모습이나 불교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절도 드물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 없어질 위기를 혼신의 노력으로 막아낸 분들 덕분에 불상, 마애불, 탱화 등 무수히 많은 유형문화재가 지켜졌다.

절이지만 불교박물관이란 이름을 함께 쓰고 있다. 1909년 조성된 마애관음보살상과 절 뒤 언덕에 감실을 파고 모신 아미타마애불이 마음에 닿는다. 불교 미술이나 민속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들려 보시기를 권한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중국인들이 섬기면서 임진왜란 때 서울에도 지어진 동묘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교수 

안양암에서 발길을 돌려 동묘(東廟)를 찾아간다. 우리나라 관우 신앙의 모태가 되는 곳이다. 어렸을 적 관우(關羽)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던 때에는 종묘(宗廟)와 동묘(東廟)를 혼동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동묘 주변에는 각종 만물(萬物)이 모이는 풍물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오늘도 사람들로 붐빈다. 언제부턴가 시작한 수리 공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겸재의 ‘동문조도’에 이번 순례길의 방문 장소들을 숫자로 표시했다. 

겸재의 그림 ‘동문조도(東門祖道)’에는 동대문 밖 너른 터에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동묘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써 놓은 그림 속 번호 5 위치)

임진왜란 때 한국에 들어온 관우 묘

사실 관우 신앙은 우리나라에는 없던 신앙이었다. 관우라고 해 보아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의리의 화신으로 그려진 정도로 특별히 무공을 세우거나 나라를 세운 일도 없이 중도에 적에게 죽음을 당한 그저 그런 장수에 불과하니, 공맹(孔孟)과 정주(程朱: 정호, 정이, 주자)에 빠져 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 까닭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관제묘 모습. 관우는 평범한 장수에서 황제의 자리로까지 높여 모셔진 인물인 만큼 중국 관제묘는 호화롭게 치장돼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러나 임진란을 겪으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명나라 원군들에게는 관우가 무신(武神)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장군의 사당인 관묘(關廟: 關羽, 關雲長 사당)에서 관왕묘(關王廟)가 되었다가 더 나아가 관제묘(關帝廟)가 되었으니 일개 장군이 왕을 거쳐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무성(武聖), 무신(武神)으로까지 받들어졌는데 이쯤 되면 문성(文聖) 공자와 무성(武聖) 관우가 쌍벽을 이루는 단계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중국인들의 믿음이다. 관우는 단순히 무성(武聖)에 그치지 않고 재물(財物)의 신으로까지 그 능력이 확대되었으니 무신(武臣)들뿐 아니라 장사하는 이들에게도 강력한 신(神)이 되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대상은 더 넓어져 이제는 모든 중국인들이 발재(發財: facai, 화차이, 돈벌게 해 달라는 기원)를 기원 드리는 신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필자는 일 년에 한두 번은 중국 역사지리 여행을 떠나는데 그때마다 그 지역에 있는 불우(佛宇), 도관(道觀), 관묘(關廟), 천후궁(天后宮) 같은 곳들을 들러 보고 다닌다. 이제 관우는 무신, 발재의 신에 머물지 않고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신으로까지 변신해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중국인들이다.

다시 임진왜란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의 조선 땅으로 돌아오자. 이런 중국인들이다 보니 조선에 파병된 명군(明軍)들은 전쟁통에 믿고 의지할 신으로 조선 땅에는 없던 관우를 의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성주(星州)와 안동(安東)에 관묘(關廟)를 세웠고 이어서 남원(南原), 강진(康津)에도 세워 네 곳의 관왕묘가 세워지게 된다. 관우의 음덕(陰德)으로 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명나라 군대의 관우 묘 소동과 사드 난리

이렇게 관묘를 세우는 일은 급기야 경성에까지 밀어닥치게 된다. 조선왕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4월 어느날 기록을 보자. 동묘가 세워지게 되는 내용이다.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이 관왕묘를 세우며 조선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서 솜씨 좋은 목수, 미장이를 보내라 한다. 이 일을 임금께서도 아셔야 할 것이라는 압력도 잊지 않는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정원이 진 유격(陳遊擊) 접반관 이흘(李忔)의 서계(書啓)로 아뢰기를,

“전일에 진 유격이 하처(下處) 후원(後園) 위의 구가(舊家)를 그대로 이용하여 관왕묘(關王廟)를 세우고 소상(塑像)을 설치하였는데 공역(功役)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유격이 신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어제 양 노야(楊老爺)를 뵙고 사당 건립 문제를 여쭈었더니 양 노야가 좋다고 하면서 즉시 와 보고는 하는 말이 ‘묘전(廟殿)이 너무 낮고 좁으니 전각을 새로 짓고 좌우에 장묘(長廟)를 세울 것이며, 앞뜰에는 중문(重門)을 세워 영원히 존속되도록 해야지 이렇게 초초(草草)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하면서, 이어 보시(報施)로 은(銀) 50냥을 내놓고 갔다. 마야(麻爺)도 오늘 50냥을 보내왔고, 형 군문(邢軍門)ㆍ진 어사(陳御史)ㆍ양 안찰(梁按察)도 필시 그 정도로 보내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다른 나머지 공역들이야 의당 우리 군사들을 시킬 것이나 목수(木手)ㆍ이장(泥匠) 등은 귀국의 솜씨 좋은 자들을 불러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귀국의 대사(大事)를 위하여 한 것이므로 그 뜻을 국왕께서도 꼭 아셔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政院以陳遊擊接伴官李忔書啓, 啓曰: “前日陳遊擊於下處後園上, 仍舊家, 立關王廟, 設塑像, 功役則時未完了矣. 卽者遊擊招謂臣曰: ‘俺昨日拜楊老爺, 稟以立廟之意, 則楊爺稱善, 卽爲來見曰: ‘廟殿甚爲卑隘, 當改構新殿, 左右設長(廟)[廊], 前庭立重門, 以爲永遠之圖, 不可如是草草.’ 仍給報施銀五十兩而去. 麻爺今日亦送五十兩, 邢軍門, 陳御史, 梁按察, 亦必依此送之矣.” 且曰: ‘他餘功役, 當以我軍使喚, 至於木手, 泥匠等, 則必得貴國善手者用之. 此事非爲我也, 正爲貴國大事. 此意國王不可不知’ 云)


그러면 조선은 미장이와 목수를 보내는 것으로 선방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사집(野史集) 대동야승(大東野乘) 속 갑진만록(甲辰漫錄)에는 민간에서 본 관묘 추진 현황이 소개되어 있다.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 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中朝人尊敬關王 關羽. 國家建廟之外. 家家戶戶. 無不設像. 起居飮食必祭. 至於出兵馬. 尤致敬焉. 戊戌春夏間. 天兵大至. 就南大門外都祭庫峴. 立關王廟. 大小將官. 無不禮焉. 至請 聖上行禮. 己亥臨罷師還. 稱爲奉聖旨. 建廟於東大門外. 留一官員董役. 中原雖曰給價. 其數無幾. 功役浩大. 皆出我國財力. 動以萬計. 事完. 國家置官守之. 都祭庫則塑像. 東大門外則銅像.


이렇게 해서 결국은 대부분 조선의 비용으로 관왕묘를 세우고 관리의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일전 싸드(THAAD) 배치 문제가 나왔을 때 필자는 400 여 년 전 있었던 관왕묘 비용 처리 문제가 생각났다. 힘이 약한 나라는 발언권이 약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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