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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속 길을 걷는다 (10) 청풍계~옥류동 下 ②] 옥류동 살던 세 부류, 힘센 김씨네와 시인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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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93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6.25 09:43:59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시멘트 길에 갇혀 생명을 잃은 옥류동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면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가지를 뻗고 있다. 어떤 길은 두 사람이 비껴가기도 힘들 만큼 좁은 길도 있는데 직선으로 된 길은 아예 찾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술래잡기라도 했다면 숨은 친구들 찾기란 아예 포기해야 했을 길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잘 가꾸면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재미있는 길이 될 것이다. 군산 해망동, 통영 동피랑 같은 길보다 역사도 있고 미로 같아서 찾는 이들이 신기해 할 것 같다. 


나와 함께 이 길을 찾아갔던 길동무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 하는 반응들이었다. 이곳 옥류동에서 살던 나의 친구 수균이도 규용이도 이곳을 떠난 후 수십 년을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랬으니 외부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한 시대 문화를 이끌었던 송석원시사


이곳 옛 옥류동 골짜기에는 좋건 싫건 기억해야 할 세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이미 언급했던 장동 김씨들이다. 또 한 그룹은 한 시대의 문화를 이끌어 갔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사람들이다. 또 한 사람은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벽수산장(碧樹山莊)의 윤덕영(尹德榮)이다. 이제 이들이 살았던 옥류동 골자기를 내려오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련다.


1935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에는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 선생의 서울 근교 산행 이야기 중 옥류동을 다녀간 기록이 있다. 고풍스러운 글체이지만 글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필자가 간단히 주(註)를 달았다.

 

내가 살던 옛 동네이지만 서울 사람을 데려가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냐?”며 놀랄 정도이니 앞으로 잘 가꿔볼 만도 하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옥인동(玉仁洞)은 옥류천(玉流泉)이 있으므로 일명(一名)은 옥류동(玉流洞)이니 옛날은 흔히 옥인동(玉仁洞)보담도 옥류동(玉流洞)이라 부르던 것이다. 이 옥류동(玉流洞)의 골짜기는 인왕산(仁旺山) 계곡 중에도 가장 심수(深邃)하며 오늘날 윤덕영씨저(尹德榮氏邸)의 부근(附近)은 곧 유명(有名)하던 옛날 송석원(松石園) 터이다. 송석원(松石園)은 말할 것도 없이 정조 연간(正祖年間)의 평민 시인(平民詩人)인 천수경(千壽慶)의 구거(舊居)이다. 일사유사(逸士遺事: 장지연 선생이 편찬한 조선 시대 중인, 평민, 천민들의 이야기)에 의(依)하면 천수경(千壽慶)의 자(字)는 군선(君善)이니 가세(家勢)가 비록 청빈(淸貧)하나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한시(漢時)에 썩 용하였다. 옥류천 위(주: 옥류천 샘 위에)에 수간모옥(數間茅屋)을 세우고 거기 기거(起居)하며 스스로 호(號)하여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 하니 그가 우대(중인이 주로 살던 지금의 서촌)에 났으나 인격(人格)이 청고(淸高)하고 시재(詩才)가 초절(超絶)하며 속류(俗類)에 섞이지 아니하고 인왕산 기슭의 유계(幽溪)에서 소요자적(逍遼自適)하여 글자대로 백운청산(白雲靑山)과 벗을 삼았었다. 그의 시 중(詩中)에 ‘有時間白雲, 鎭日對靑山(어떤 때는 흰 구름, 해지면 청산과 마주하네)’의 구(句)가 있으니 이것이 곧 그의 담박(澹泊)한 생활일면상(生活一面上)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거니와 송석도인(松石道人)은 그 생활 자체(生活自體)가 시적(時的)이었다. 그에게 오자(五子: 아들 다섯)가 있으니 제일자(第一子)는 송석원(松石園)의 송(松)을 떼어다 송(松)이라 짓고 제이자(第二子)는 송석원(松石園)의 석(石)을 떼어 석(石)이라 이름 짓고 제삼자(第三子)는 족(足)이라 이름 지으니 족(足)은 이만하면 족(足)하다는 의미(意味)이며 제사자(第四子)는 과(過)라 이름 지으니 과(過)는 너무 과(過)하다는 의미(意味)이며 제오자(第五子)는 하(何)라 이름지으니 하(何)는 이것이 웬일이냐 하는 의미(意味)이다.”

 

중인 출신 천수경이 위항문학 시모임 만들어


이렇게 옥류동에는 조선 정조 연간에 중인 출신 시인 천수경(千壽慶)이 초가집을 지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집 이름을 짓고 살았다. 그는 애들 글 가르치는 훈장에 불과했으니 요새말로 하면 지체도 별로지, 돈도 없지, 권력도 없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구름과 청산이나 마주하고 지냈으니 요즈음의 가치관으로 보면 맹탕 꽝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잘하는 게 있었는데 한문과 한시(漢詩)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와 그의 친구 장혼(張混)은 세상 어린이들이 공부할 교과서를 여러 권 지었고, 자신의 집 송석원을 중심으로 시(詩)를 사랑하는 중인들의 모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일반 대중문학이라 할 수 있는 위항문학(委巷文學), 여항문학(閭巷文學)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천수경과 함께 시모임을 결성한 장혼은 이 시모임을 결성한 이유를 그의 문집 이이엄집(而已广集)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은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직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博奕之交不日 酒色之交不月 勢利之交不年 惟文學之交可以永世).’ 바둑 두는 이, 술 좋아하는 이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일방적이지만 자신들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느라 오버한 것이리라.


호암 문일평 선생은 ‘이 자연시인(自然詩人) 천수경(千壽慶)의 놀던 자취나 더듬어볼까 하여 어느 날 오후에 지우 수인(知友 數人)으로 더불어 송석원 계곡(松石園 溪谷)을 찾아갔다.’ 그러나 천수경의 송석원 흔적은 찾지를 못하고 윤덕영의 벽수산장 근처쯤 되려니 생각하며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천수경의 송석원은 옥류천 샘 위 소나무 바위 아래(玉流泉上 松石之下)에 있었다는데 초가집의 흔적이 그때까지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계류(溪流)를 거슬러 골짜기로 들어가니 과연 인왕산동부(仁旺山洞府)로는 가장 웅심(雄心)한 데라고 생각키며 이곳에서 천 시인(千詩人)이 음영배회(吟詠徘徊)한 것도 그럴 듯하다. 골짜기는 셋으로 나누었는데 세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조그만 삼계류(三溪流)는 지치바위(芝草바위: 바위 아래 지초가 자랐다 함) 앞에 이르러 서로 모여 일계류(一溪流)를 이루어 혹(或)은 수인석애(數仞石崖: 몇 길 바위 절벽)의 좁은 협곡(峽谷)을 몇이나 통과(通過)하여 송석원(松石園) 앞의 수문(水門)으로 내려간다. (중략) 와룡당(臥龍堂)이란 신묘(神廟) 앞에 닿았다. 서늘한 수음(樹陰) 아래 잠깐 흉금(胸襟)을 풀고 청렬(淸冽)한 약천(藥泉)에 목을 축인 후(後) 다시 걸음을 옮겨 범바위를 바라보며 골짜기의 깊은 데로 더 올라갔다.’

 

‘뿐이다 선생’의 글에서 보는 단촐한 삶


아쉽게도 지금은 세 줄기의 물길도, 제갈공명을 모셨을 와룡당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시원한 약수물로 목을 축였는데 아쉽게도 약수물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가재우물이거나 또 이 골짜기에 있었다는 우혜천(又惠泉)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천수경의 흔적은 이 골짜기에서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행인 것은 송석원 시사의 기록들이 전해져 이들의 활약상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천을 시멘트로 덮었지만 아직도 물길은 흐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옥계시사(玉溪詩社, 송석원시사)는 정조 10년(1786년) 천수경, 장혼(張混) 등 인왕산 주변에 살던 중인들이 결성하였다. 아마도 동진(東晋) 왕희지의 난정수계(蘭亭修禊)와 촌음 유희경의 풍월향도나 삼청시사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15세에서 37세까지 초기 13명이 모인 그들은 매월 모여 시를 짓고 경조사를 함께 나누면서 인생을 일구어 갔다. 천수경의 서당 친구이며 옥계시사의 중요 멤버였던 장혼은 그의 문집 이이엄집(而已广集)에서 그와 그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뿐이다’를 자신의 호로 지은 장혼의 ‘이이엄집’ 속에 실린 그의 버킷리스트. 

이이엄(而已广)은 그의 집 이름인데 당나라 한유(韓愈)의 싯귀 破屋三間而已(허물어진 집 세 칸일 뿐)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왔다. 그가 집 이름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나는 명을 들을 뿐이다. 그래서 집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聽之天而已 故扁之广以而已)’라고 했듯이 그는 천명에 순응하고 살 따름이라는 순천명(順天命)을 가슴에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생각도 깊어 아름다움(美)에 대한 생각도 탁월했다. 美不自美 因人而彰(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빛난다)고 했으니 옥계시사의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장혼은 천수경이 사는 옥계로 이사 오려고 벼르다가 옥계 끝 산발치 구석진 곳에 10무(畝: 약 300 평)의 누추한 집이 있는 땅을 50관(貫)에 마련한다. 그리고는 집을 지을 구상을 한다. 그 집의 설계가 이이엄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돈이 없어 10년을 기다렸다. 이이엄집에는 평생지(平生志)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천명에 맞추어 살려는 장혼의 버켓 리스트(bucket list)가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소박한 희망 사항이다. 뿐이다(而已)로 이어가는 그 글을 잠시 살펴 본다. 숨막히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때로는 쉬어가라 넌지시 일러 주는 말들이다.

 

푸른 느티나무 한 그루 심어 문 밖에 그늘 드리우고 벽오동 한 그루 집 밖에 심어 서쪽으로 달빛 받아들이고 포도 시렁 얹어 옆쪽 햇빛 가린다. 잣나무 한 구비 병풍처럼 심어 집 오른쪽 문을 가리고 파초 한 그루 그 왼쪽에 심어 빗소리 들으리라. (중략)


홀로 있을 때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오래된 책을 펼쳐 보며 한가롭게 할 뿐이다. 생각나면 나가 산길을 걸을 뿐이고 손님이 오면 술을 내와 시를 읊을 뿐이다. 흥이 오르면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부를 뿐이며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실 뿐이다. 춥거나 더우면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저물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 눈 오는 한낮, 저물녘의 노을, 새벽의 달빛, 그윽한 집의 신비로운 운치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어렵다. 말해준들 사람들은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가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내 평생의 바람이다. 이와 같이 살다가 마칠 뿐이지.


綠槐一樹植門前以蔭. 碧梧一樹樹外軒. 西受月影. 葡萄架架其側以承陽. 柏屛一曲樹外舍之右以塞門. 芭蕉一本種其左以聽雨. (중략) 獨居則撫破琴閱古書而偃仰乎其間而已. 意到則出步山樊而已. 賓至則命酒焉諷詩焉而已. 興劇則歗也歌也而已. 飢則飯吾飯而已. 渴則飮吾井而已. 隨寒暑而衣吾衣而已. 日入則息吾廬而已. 其雨朝雪晝. 夕景曉月. 幽居神趣. 難可爲外人道也. 道之而人亦不解焉耳. 日以自樂. 餘以遺子孫. 則平生志願. 如斯則畢而已.

 

정조 시대에 술집 금지 풀리며 
술집 잡부로 일해 연명한 시인도 등장  

 

이런 것이 장혼뿐 아니라 옥계시사 멤버들의 마음이었다. 


모이면 그 달에 할 일도 정했는데 옥계사십이승(玉溪社十二勝)이라 했다. 이 또한 거스름이 없는 내용들이다. 그 당시 한양에 유행하던 여러 놀이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 중 하나다.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등에는 이와 같은 내용들이 실려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음력 10월 초하룻날에는 이른바 난로회라 하여 난로 가에 둘러앉아 번철에 고기를 구워먹는 풍습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쟁식(鐺食)이라 했는데 이들도 10월에는 마주 앉아 난로회를 하며 고기를 구워(炙) 먹었음을 알 수 있다.

 

10월 초하루면 둘러 앉아 번철에 고기를 구워먹는 난로회가 열렸다(단원의 그림). 

1월. 달구경하며 다리 밟기(街橋步月)
2월. 산에 올라 꽃 구경(登高賞華) 
3월. 강에 나가 시원하게 놀기(江淸遊)  
4월. 성루에서 초파일 연등 구경(城臺觀燈)
5월. 밤비에 더위 식히기(夜雨納凉) 
6월. 물가에서 갓끈 씻기(臨流濯纓)  
7월. 단풍 든 산기슭의 수계(楓麓修) 
8월. 국화 핀 뜨락의 단합 모임(菊園團會)                         
9월. 산사의 깊은 결속(山寺幽約) 
10월. 눈 속에 마주앉아 고기 구워 먹기(雪裏對炙)  
11월. 매화나무 아래에서 한 잔(梅下開酌)
12월. 섣달 그믐날 밤새우기(臘寒守歲)


그들은 직업도 다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시(詩)를 사랑한다는 점과 한문에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는 서당 훈장을 했고, 어떤 이는 규장각 서리, 어떤 이는 무관, 어떤 이는 승정원 서리, 어떤 이는 비변사 서리, 어떤 이는 감인소 사준(인쇄 교열직), 심지어 왕태(王太) 같은 이는 무과에 급제하기 전에는 집안이 똥구멍이 째지게 가난하여 술집 중노미 일을 했다. 


중노미란 술집에서 막일 하는 일꾼이다. 혜원의 그림 중에 선술집 모습을 그린 것이 있는데 그 그림 중에 중노미 청년이 서 있는 모습도 있으니 왕태가 했던 일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 또한 영조 시대였다면 없었던 일거리였다.  영조는 나라에 부족한 곡식을 술 만드는 데 소비할 수 없다 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금주령은 확고해서 각 지방에 암행어사도 파견하였고 심지어 추상같은 금주령을 심히 위반한 벼슬아치는 참수하여 영(令)을 세우기도 하였으니 술 못 참은 술꾼의 최후치고는 참으로 딱하다.  

 

혜원의 선술집 그림. 중노미가 보인다.

그런데 영조 시대가 끝나고 정조 시대가 도래하자 세상이 달라졌다. 애주가에 애연가인 정조는 금주령을 해지했는데 봇물 터지듯 도성 안팎으로 선술집이며, 색주가며, 기생집들이 넘쳐났다. 이 시대는 술과 담배, 문학, 그림 등 각종 장르의 문화와 예술이 폭발적으로 발산된 살판나는 세상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태 또한 술집 중노미를 호구지책으로 삼아 기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연 2회 맨손으로 시 경연대회 열고
그 최고작을 베끼느라 바빴으니 

 

일은 이처럼 낮은 신분의 것들을 했지만, 송석원시사 그들의 시는 아름다웠다. 이들은 쓴 시를 문집으로 엮었는데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 수계첩에는 이들의 시와 함께 겸재의 제자 임득영의 그림 4편도 실려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풍을 잘 따르고 있는데 옥계십경이거나 옥계사십이승이 모두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임득영 작 街橋步月(가교보월). 옥계사수계첩에 실린 네 그림 중 하나다.

한편 옥계시사는 처음 13명에서 시작하여 인원도 늘어갔고, 그 영향력이 대단해져서 양반들도 이 시 모임에 관심을 가졌다. 이른바 시 좀 하는 이라면 옥계시사와 연결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추사도 이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미 명필로 소문이 난 32세 때에는 松石園(송석원)과 又惠泉(우혜천)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고 이곳 바위에 새겨졌다. 


옥계시사(송석원시사)는 연 2회에 걸쳐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경연대회를 열게끔 되었다. 백전(白戰)이 그것인데 누구나 시 솜씨를 알리고 싶은 이들은 여기에 참여하여 자신의 실력을 알렸다. 모인 이들을 남과 북으로 나누어 주재자가 운(韻) 자(字)를 내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남측은 북측에서 낸 운(韻) 자로, 북측은 남쪽에서 낸 운(韻) 자로 시를 지어야 했다. 많을 때는 300명이 넘는 이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고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하니 그야말로 한시 전국경연대회였던 셈이다. 여기서 뽑힌 시들을 너도나도 필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다. 그런데 백전(白戰)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이라 한다. 요새말로 백수(白手)라 함은 직업 없는 빈손을 뜻하는 말이니 비추어 보면 백전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이 송석원시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영향을 미쳐 인왕산 주변을 필두로 청계천변, 북촌 등 10여 개의 시모임이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른바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전성시대를 이끈 것이다. 


한편 이들은 정조 21년(1797년) 저간의 글을 모은 풍요속선(風謠續選)을 간행하였다. 속선이라 한 까닭은 이보다 60년 전인 영조 13년(1737년)에 조선 초기부터 숙종조까지 위항문학 시선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가 발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37년, 1797년이 정사년(丁巳年)인데 이때부터 정사년이면 위항문학 시집 풍요를 내는 게 전통이 되었다. 1857년에는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와 위항문학의 터전을 든든히 하였다.


이들의 모임을 그린 소중한 그림 두 점이 남아 있다. 도화서 화원 김홍도와 이인문이 1791년 유두절에 옥계시사원 9명이 가진 모임을 그린 수준급 그림이다. 이 두 그림은 이 모임에 참석했던 김의현(金義鉉)이 이날 지어진 시들과 함께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에 묶었기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인문이 그린 송석원시회 아회도.

이인문은 낮 모임을 그렸고, 김홍도는 밤 모임을 그렸다. 흔히 송석원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로 부르는 이 두 그림은 두 화원이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이들로부터 부탁을 받고 나중에 그린 것이다. 아마도 맨입은 아니었을 것이며 당대 최고의 도화서원에게 청하여(주문하여) 그린 그림이니 사례도 좀 되었으리라

 

송석원 시모임을 그린 소중한 두 그림


한편 두 도화서원은 개인의 부업을 직장에서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인데 이인문의 그림 우측 상단에는 ‘단원의 거처에서 그렸다(寫於檀園所)’라는 기록을 적어 놓아 이 그림들의 스토리를 짐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려진 시와 그림은 김의현에 의해 철해져 집에 보관되었는데 우연히 김의현 집에 들렀던 동네 대선배 마성린(眉山 馬聖麟, 1727~1798)이 그 그림에 제시(題詩)를 써주었다. 승문원 서리였으며 시모임 구로회원인 마성린은 글씨도 잘 썼고 형편이 좋아 인왕산변 위항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많이 했다 한다. 그러기에 30년여 후배들과 어울려 지내며 왕래했던 것이다.


이 그림들을 보면 250여 년 전 인왕산 동쪽 옥류동에서 맺어진 따듯한 사람들의 정(情)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옥류동 어디를 그린 것일까?  이인문의 그림 속에는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씨가 힌트로 쓰여 있으니 궁금증을 가지고 옥류동 시멘트 길을 내려온다. 평탄한 곳에 이르렀을 즈음 우측으로 오래되어 퇴락할 대로 퇴락한 구옥이 언덕 위에 보인다. 누구네 집이었을까? 

 

심하게 세월이 느껴지는 이 퇴락한 한옥엔 누가 살았을까 궁금해진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통의동 백송 ~ 자교교회 ~ 청운초교 ~ 백세청풍 각자(청풍계) ~ 맹학교(세심대) ~ 농학교(선희궁터) ~ 우당기념관 ~ 옥류동(청휘각, 가재우물, 송석원, 벽수산장 흔적) ~ 인곡정사터 ~ 박노수 미술관 ~ 백호정터 ~ 택견전수터 ~ 수성동 계곡 ~ 백사실 ~ 세검정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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